생각들

니체와 아이 그리고 파우스트

Razelo 2021. 6. 25. 20:46

사람들은 정답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그것이 수학문제가 되었든 인생의 중요한 결정이 되었든 삶의 연속된 선택의 순간들 속에서 정답을 찾으려 노력한다. 수학문제처럼 명확한 답이 나오면 좋겠지만 인생은 그렇지 않다. 답이 나온것같아도 그것이 정말 맞는것인지 의문이 들기 마련이다. 그러니 정확한 정답은 없는 셈이다. 오직 근사치에 다다를 뿐이다. 

얼마나 정답에 가까워지느냐를 두고 머리를 감싸매고 고민하고 또 고민한다. 

 

물론 어딘가에 정답은 있을 것이다. 사람이 정의내리지 못하는 어느 곳엔가 올바른 판단과 절대적 기준이 존재할 것이다. 우린 그것을 이데아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데아이기때문에 그저 그림자밖에 볼 수 없는 인간의 시야탓에 오로지 근사한 답을 얻어낼 뿐이다. 

 

근사한 답을 얻어가며 삶을 살아가는 보통의 사람들은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고 새로운 미래를 다짐한다. 하지만 언제나 아쉬움이 남는 법이다. 아쉬움에 그친다면 그나마 감사한 일이다. 고통으로 남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정말 정답이 중요한 것일까?

 

그 누구도 정확한 정답을 얻어낼 수 없다면 정답을 찾는 것에 의미가 있는가. 정답에 가까워지게 정밀도를 높이는 행위는 정확해질수록 어려워지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정말 정답 그 자체를 찾는 것이 중요한것일까.

 

정답을 찾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언젠가 파우스트 박사의 삶에 대해 논한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그 글귀가 항상 머릿속에 멤돈다. 

 

진리를 찾는 행위의 의미는 진리를 찾음에 존재하지 않는다. 진리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그 과정이 고귀한 것이며 진리를 찾으려 일평생을 바치는 인간상이야말로 진정 고귀한 인간이다. 그 과정속에서 인간이라는 한계 속에 겪을 수 있는 모든 일들은 절대 진리를 찾으려 노력하는 인간이라는 구절 아래 그저 하나의 이야깃거리가 되는 것이다. 

 

정확히는 이 말이 아니었다. 이것과는 사뭇 비슷하면서도 다른 구절이었는데 어째 곱씹고 또 곱씹다보니 이렇게 변했다. 

변했다기보다는 내가 씹어서 다시 뱉었다고 보는 게 맞겠다. 

 

삶을 의식하지 않고 진리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인간상. 그런 의미에서 니체가 원했던 인간상과 파우스트 박사의 인간상은 두 가지 갈래길이 될 수 있다. 

 

아이는 파우스트가 될 수 없으며 파우스트는 아이의 삶을 살아낼 순 없다. 오히려 지치지않는 사자에 가깝다. 어째 정답을 찾는 것이 의미없다는 이야기로 시작했지만 또다시 두 가지 갈림길 중 고민을 하는 것을 보면 아이가 되는 것이 조금 더 어렵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고뇌하며 진리를 찾는 것이 인간의 속성 중 하나이기에 아이가 되려 노력하는 것은 역변에 가깝다.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언제나 고통스럽기에 아이가 될 수 있는 인간은 진정 축복받은 인간임에 틀림없다. 

 

아이가 되려 노력하지 말라. 아이가 될 수 없음을 깨달았다면 파우스트가 되어라. 이미 아이인 사람은 박사도 아이도 그 어느 것도 희망하지 않고 그저 순간을 즐기는 인간이기에 그 어느 것도 선택할 필요없다. 오직 아이가 되려 발버둥치는  사람만이 파우스트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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